세상이 그를 알아보기까지 — 브록만 갤러리와 흑인 예술가들의 긴 기다림
1967년, 로스앤젤레스 남부 레이머트 파크의 한 거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와츠 반란의 불길이 가라앉은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 거리 한 켠에 형제 두 사람이 갤러리 문을 열었습니다. 알론조 데이비스와 데일 브록만 데이비스였습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주류 미술계가 이 갤러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는, 그 이름이 한동안 미술사 어디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평가들의 관심도, 큰 기관의 조명도 없었습니다. 그저 동네 화랑처럼 여겨지거나, 아예 존재 자체가 무시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갤러리는 조용히 문을 닫았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은 이 갤러리에 처음으로 대규모 전시를 헌정했습니다. 60점이 넘는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서입니다.
왜 그 시대는 이 갤러리를 보지 못했는가

브록만 갤러리가 문을 연 1967년은 미국 미술계가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에 열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뉴욕의 갤러리들은 백인 남성 작가들의 차갑고 정제된 작업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고, 그 바깥의 목소리는 좀처럼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라는 지역적 위치 자체도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당시 미술 시장의 중심은 뉴욕이었고, 서부 해안은 여전히 변방 취급을 받았습니다. 거기다 브록만 갤러리는 흑인 예술가들을 위한, 흑인 예술가들에 의한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주류 미술 제도가 품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와츠 반란이라는 배경도 이 갤러리를 향한 시선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란 이후의 레이머트 파크는 사회적 긴장과 빈곤이 공존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시각으로는 ‘예술을 한다’기보다 ‘정치를 한다’는 식으로 읽히기 쉬웠습니다.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맥락이 뒤섞여 판단되던 시대였으니까요. 데이비드 해먼스, 베티 사르, 세나 넨구디 같은 작가들이 이 갤러리를 통해 초기 경력을 쌓았지만, 그 사실이 당대 미술 비평 지면에 충분히 기록되지 않았던 것은 그런 구조적 외면의 결과였습니다.
구조를 오래 들여다보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으로서 한 가지 생각이 듭니다. 어떤 시스템이든, 그 안에서 정보가 흐르지 않는 지점이 있으면 반드시 왜곡이 생깁니다. 1967년의 미술 제도는 브록만 갤러리로 향하는 통로 자체를 열어두지 않았습니다. 정보가 흐르지 않으면 가치도 전달되지 않는 법입니다.
재평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브록만 갤러리가 닫힌 것은 199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갤러리가 초기에 길러낸 예술가들은 갤러리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작업했고, 점차 미술계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드 해먼스는 오늘날 미국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목소리 중 하나로 꼽히며, 베티 사르의 작업은 미술사 교과서에 실립니다. 세나 넨구디, 수잔 잭슨, 율리시스 젠킨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가들이 재평가되면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처음 주목받은 곳은 어디였는가. 누가 이들에게 처음으로 전시 공간을 내주었는가. 그 질문의 끝에 브록만 갤러리가 있었습니다. 재평가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중심이 확장될 때, 그 중심을 처음 지탱했던 주변부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갤러리가, 뒤늦게나마 LACMA라는 대형 기관의 전시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 확장의 결과입니다.
이번 LACMA 전시는 브록만 갤러리를 처음으로 대규모로 다루는 전시라고 합니다. 60점 이상의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1967년부터 1990년까지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단순한 회고가 아닙니다. 그 공간이 당시 레이머트 파크 지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예술적 허브이자 공동체의 거점으로서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함께 들여다보는 작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읽어야 할 것
브록만 갤러리 이야기가 지금 이 시점에 다시 꺼내지는 것은 단순한 역사 정리가 아닐 것입니다. 기사가 전하듯, 이 전시는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LA 흑인 예술가들의 역사와 유산을 추적합니다. 그 유산은 레이머트 파크라는 한 동네 안에서 시작되었고, 수십 년을 거쳐 미술관의 벽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갤러리가 와츠 반란 직후에 세워졌다는 점입니다. 도시의 균열이 가장 깊었던 시간, 두 형제는 갤러리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지역 사회에 대한 응답이었는지, 저항이었는지, 혹은 단순히 예술을 향한 열망이었는지는 외부에서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어떤 예술가들을 품고 키워냈는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대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시간이 지나 보이게 되는 일은, 미술사에서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브록만 갤러리의 경우는 단순히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미술 제도 자체가 특정한 목소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외면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외면이 끝나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브록만 갤러리의 55년 여정은 조용하고 단단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