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구워 벽을 세운 사람 — 도일 레인의 무명 시절

작은 가마 앞에 쪼그려 앉아 불 온도를 가늠하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손에는 이미 수백 번 흙을 매만진 흔적이 남아 있고, 그가 빚은 작은 도자기 조각들은 갤러리 문 한 번 두드려보지 못한 채 작업실 선반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한 구석, 도일 레인은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였습니다. 세상이 그를 발견하기 훨씬 전의 일입니다.

헌팅턴 도서관·미술관·식물원이 지금 열고 있는 회고전 “도일 레인: 점토의 거장(Doyle Lane: Master of Clay)”은 그의 작품 백 점 이상과 기록 문서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았습니다. 소박한 화병에서 시작해 건축 규모의 벽화 커미션까지, 그 여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기사는 담담하게 씁니다. 이 전시가 그를 “20세기 중반 캘리포니아 모더니즘과 남캘리포니아 스튜디오 도예 운동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동시에, 그가 흑인 예술가로서 맞닥뜨린 장벽들을 살펴본다”고. 그 한 문장 안에 얼마나 긴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지, 저는 미술관 기사를 읽다가 잠시 손을 멈췄습니다.

흙과 고립, 그 사이 어딘가

도일 레인 (Doyle Lane)
출처: 위키백과 – Doyle Lane

도일 레인이 활동하던 시절, 미국 도예계는 결코 평평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20세기 중반 캘리포니아 스튜디오 도예 운동 한복판에 있었지만, 동시에 흑인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 그 운동의 ‘정식 구성원’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갤러리 문은 기회가 아니라 장벽에 가까웠고, 비평의 언어는 그를 향해 좀처럼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들었던 것들을 보십시오. “위드 팟(weed pots)”이라 불리는 작고 날렵한 화병들, 도자기 물감처럼 유약을 입혀 구워낸 “클레이 페인팅(clay paintings)”, 구슬과 장신구, 그리고 마침내는 건물 벽을 가득 채우는 대형 건축 커미션까지. 이것들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한 점 한 점 쌓아올린 것들입니다. 엔지니어링으로 오래 밥을 먹은 사람으로서 저는 이런 작업 방식에 묘하게 눈길이 갑니다. 반복 실험과 미세한 조정 끝에 비로소 구조가 완성된다는 논리, 그것이 도일 레인의 가마 안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경제적 고립은 예술가의 고투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종류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작업실 임대료를 걱정하면서도 흙을 빚습니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유약 배합을 다시 계산합니다. 그 시절의 도일 레인이 정확히 어떤 하루하루를 살았는지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만, 그가 남긴 작업의 밀도가 그 시간을 대신 증언합니다. 헌팅턴의 전시에 포함된 기록 문서들이 그 시절의 일부를 보여준다고 하니, 직접 보지 않고서는 뭐라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백 점이 넘는 작품과 기록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버틴다는 것의 다른 이름

도일 레인 (Doyle Lane)
출처: 위키백과 – 도일 레인 (Doyle Lane)

전시 기사는 그가 “기능적 도자기에서 기념비적 벽화로” 진화했다고 적습니다. 이 진화라는 단어를 저는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습니다. 진화는 단선적인 성장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실패한 소성(燒成)과 깨진 유약층과 다시 펼친 설계도 위에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작은 위드 팟에서 출발해 건물 외벽을 덮는 모자이크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어느 순간의 도약이 아니라 오랜 인내의 물리적 결과입니다.

흑인 예술가로서 그가 넘어야 했던 장벽이 단순히 개인적 역경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미국 예술 제도는 구조적으로 특정 목소리를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그 구조 안에서 도일 레인은 흙을 계속 빚었습니다. 전시 제목이 “거장(Master of Clay)”인 것은, 그 장벽들을 넘고 나서야 비로소 붙는 수식어입니다. 장벽이 있는 동안에는 그런 호칭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의 시간이 진짜 이야기입니다.

전환점이 어디였는지를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예술가에게는 한 번의 전시가 계기가 되고, 어떤 예술가에게는 그냥 오랫동안 계속하다 보니 세상이 먼저 고개를 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일 레인의 경우가 어느 쪽에 가까웠는지, 지금의 회고전 자료들이 조금씩 밝혀주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기다리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흙을 빚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규모를 키워나갔고, 결국 건축의 언어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흙에서 건지는 것

도일 레인 (Doyle Lane)
출처: 위키백과 – 도일 레인 (Doyle Lane)

헌팅턴의 전시는 2027년 3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전시 구성을 보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공공의 것으로 이동하는 도일 레인의 경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위드 팟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화병들, 직접 촬영한 것처럼 묘사된 나비 문양의 클레이 페인팅, 그리고 건축 커미션. 이 세 단계 사이에는 오랜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은 대부분 무명이었습니다.

저는 미술관에서 오래된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습관처럼 묻습니다. 이것이 만들어질 당시, 이 사람은 어떤 처지였을까. 도일 레인의 작품 앞에서도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사가 그 답의 일부를 알려줍니다. 그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 장벽이 구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흙을 계속 구웠습니다.

“기능적 도자기에서 기념비적 벽화로”라는 문장은 결과만 담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하루들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알 수 없는 하루들이, 지금 우리가 헌팅턴에서 보게 되는 백 점 이상의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무명의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작업이 축적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정받기 전의 시간이 작업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것, 도일 레인의 가마는 그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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