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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세기를 함께한 하프시코드, 그리고 마지막 쉼표

    반세기를 함께한 하프시코드, 그리고 마지막 쉼표

    앙상블의 공식 성명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오랜 디미누엔도 끝에, 그녀는 마지막 쉼표에 이르렀습니다.” 디미누엔도(diminuendo) — 음악에서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떤 긴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붙은 한 마디, “Good music, wherever you may be.” 이것이 I Musici가 반세기를 함께한 동료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마리아 테레사 가라티(Maria Teresa Garatti). 브레시아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로마로 건너와 막 첫 음을 내딛기 시작한 앙상블에 합류했습니다. 그 앙상블이 I Musici였고, 그녀는 이후 50년을 그 자리에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습니다. 50년. 숫자만 놓고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한 사람이 하나의 집단과 함께 반세기를 보낸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일인지는, 쉽게 말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쉼표 이후에 비로소 들리는 것들

    Maria Teresa Garatti
    출처: 위키백과 – I Musici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라티의 경우, 그것은 그녀가 I Musici와 함께 남긴 수많은 녹음들입니다. 앙상블의 성명은 “수십 년에 걸쳐 I Musici와 함께 만든 수많은 레코딩 속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비발디의 사계를 포함한 18세기 이탈리아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한 그 녹음들 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앙상블이 그녀의 죽음을 알리면서 선택한 단어들이 모두 음악의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디미누엔도, 마지막 쉼표, 그리고 “Good music.”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삶이 음악과 완전히 겹쳐 있을 때, 그 삶의 끝을 음악의 문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방식입니다. 가라티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악보였고, 이제 마지막 쉼표가 찍혔습니다. 쉼표는 끝이 아닙니다. 음악에서 쉼표는 다음 음을 위한 공간입니다. 그 비워진 자리가,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오래 그 자리를 채워왔는지를 드러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가 어떤 인터뷰를 했는지, 어떤 말을 남겼는지는 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세기 동안 하나의 앙상블 안에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앙상블의 성명이 그녀를 두고 “외모는 온화하지만 작업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지칠 줄 몰랐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 조용하고 꾸준한 헌신이 50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어냈습니다.

    반세기라는 구조물이 남기는 것

    Maria Teresa Garatti
    출처: 위키백과 – Maria Teresa Garatti

    저는 오랫동안 구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학을 오래 다뤘던 사람의 버릇인지,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도 그 안에 담긴 설계를 먼저 눈으로 더듬게 됩니다. 가라티가 I Musici와 함께 쌓아온 반세기는, 제게 하나의 정교한 구조물처럼 보입니다. 개별 음은 사라지지만 구조는 남습니다. 그녀가 연주한 수많은 음들은 공기 중에 흩어졌지만, 그 음들이 쌓아 만든 녹음들은 여전히 남아 재생됩니다.

    I Musici는 성명에서 그 여정을 “어쩌면 되풀이될 수 없는(unrepeatable)”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국제적인 명성, 18세기 이탈리아 음악의 세계적 보급, 비발디의 사계를 전 세계에 알린 일. 이것들이 단순히 한 앙상블의 성과가 아니라, 가라티를 포함한 구성원들이 함께 빚어낸 결과라는 것을 앙상블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후에 그녀의 이름이 더 또렷이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살아서 화려하게 주목받는 것과, 사후에 구조의 일부로 기억되는 것은 다릅니다. 가라티는 후자입니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에 비해 소리가 작습니다. 화려하게 앞으로 나서는 악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크 앙상블에서 하프시코드가 빠지면, 음악 전체의 토대가 흔들립니다. 가라티가 50년간 해온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 사후에 남겨진 추모의 말들이 그 자리의 무게를 뒤늦게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조용한 헌신이 시간을 이기는 방식

    예술가의 유산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저는 종종 생전에 얼마나 크게 이름을 알렸느냐보다, 사후에 무엇이 남았느냐를 더 주목하게 됩니다. 가라티의 경우, 남은 것은 녹음들입니다. I Musici가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낸 그 레코딩들 속에 그녀의 하프시코드 연주가 담겨 있고, 그것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재생되고 있을 것입니다. 비발디의 사계를 듣는 누군가가, 그 안에 담긴 하프시코드 소리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소리는 여전히 그녀의 것입니다.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가장 조용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가라티는 “gentle in appearance”라고 앙상블이 묘사했습니다. 온화한 외모. 그러나 50년의 헌신이 보여주듯, 그 온화함 뒤에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I Musici의 역사를 만드는 데 깊숙이 박혀 있었습니다.

    앙상블은 그녀에게 “어디에 있든 좋은 음악을”이라고 인사했습니다. 이 문장이 단지 관용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50년을 함께 음악을 만든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진짜 언어처럼 느껴집니다.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함께 만든다는 것이고, 그 함께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말은 짧아지고 의미는 깊어집니다.

    한 사람이 50년 동안 묵묵히 지킨 자리가 결국 앙상블의 역사 전체를 떠받치고 있었다는 사실 — 그것은 어떤 화려한 솔로 무대보다도 오래가는 종류의 존재 방식입니다.

  • 무용수의 몸짓이 화폭을 흔들다 — 바레 신스키가 회화에 남긴 궤적

    무용수의 몸짓이 화폭을 흔들다 — 바레 신스키가 회화에 남긴 궤적

    1912년 파리의 무대 위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한 화가들은 모두 같은 경험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무용수의 몸이 중력을 거스르는 순간, 그들의 망막에는 단순한 움직임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구조가 박혔던 것입니다. 바레 신스키(흔히 니진스키로 알려진)가 무대 위에서 펼쳐낸 것은 발레의 고전적 아름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가 얼마나 기묘하고 파격적인 조형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었고, 그 실험이 화실과 갤러리의 벽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무용수에서 출발한 형태의 혁명

    바레 신스키
    출처: 위키백과 – Vaslav Nijinsky

    니진스키는 단순히 뛰어난 무용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발레의 모든 규칙을 반대로 돌려 놓는 사람이었습니다. 1910년대 초, 파리의 발레 뤼스 무대에서 그는 발가락으로 선 채 몸을 구부리고, 팔을 자연스럽지 않은 각도로 꺾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발레의 전통이 추구해온 우아함과 직선적인 상승감 대신, 그의 몸은 다각형이 되었고, 기하학적 긴장으로 가득 찼습니다.

    특히 1912년 초연한 <아프레-미디 디운 포운>과 1913년의 <봄의 제전>에서 그의 움직임은 더욱 도발적이 되었습니다. 전통 발레의 매끄러운 곡선성을 거부하고, 마치 인체를 각도와 무게의 문제로 다시 해석하듯 춤을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용의 혁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형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었고, 그 의문이 당대의 회화 운동과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입체파 화가들의 눈에 포착된 신체

    바레 신스키
    출처: 위키백과 – 바레 신스키

    1912년경 파리에서는 피카소, 브라크, 레제 같은 입체파 화가들이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문제로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 니진스키의 무용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발레 뤼스의 공연을 직접 보았고, 그들의 스케치북에는 무용수의 ‘파편화된’ 몸이 기록되었습니다. 움직임의 궤적이 아니라, 특정 순간의 신체가 어떤 기하학적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입체파의 핵심은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니진스키의 춤은 정확히 그것을 신체로 실현했습니다. 그의 움직임은 한 번에 하나의 우아한 곡선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개의 불균형한 형태들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화가들에게는 새로운 형태 언어의 가능성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일부 입체파 화가들은 발레 뤼스의 무대 디자인에 직접 참여했는데, 이는 무용과 회화 사이의 경계가 실제로 무너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신체의 해방이 캔버스에 다시 그려지다

    바레 신스키
    출처: 위키백과 – 바레 신스키

    니진스키 이후, 회화에서 인체를 다루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신체는 더 이상 자연의 재현이거나 이상화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과 평면, 각도와 질량의 문제로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또는 레제의 기계적 인체 표현들을 보면, 니진스키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파편화되고 재구성된 신체’의 영향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영향이 회화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초현실주의 운동이 확산되면서, 무용과 회화의 협력은 더욱 밀접해졌습니다. 미로, 달리 같은 화가들과 무용가들의 협업이 잦아졌고, 그 바탕에는 니진스키가 보여준 ‘신체의 해방’이라는 선례가 있었습니다. 무용수의 몸이 더 이상 발레의 고전적 언어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화가의 손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물론 니진스키의 삶은 그 이후 극적인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정신 건강의 악화로 춤을 더 이상 추지 못했고, 그의 후반부는 자신이 몸으로 보여준 형태의 혁신과는 거리가 먼 침묵 속에서 보내집니다. 하지만 그가 무대 위에서 몸으로 만들어낸 형태들은 계속해서 다른 예술가들의 손으로, 붓으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장르 간의 경계 해체와 협력은 사실 훨씬 더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것이고, 그 출발점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몸이 규칙을 깨뜨리는 용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낭만주의의 방해꾼, 후대가 발견한 천재 — 안톤 브루크너의 재평가

    낭만주의의 방해꾼, 후대가 발견한 천재 — 안톤 브루크너의 재평가

    1891년 빈의 음악홀.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 초연이 끝났을 때, 청중의 반응은 침묵에 가까웠습니다. 몇 사람은 박수를 쳤지만 대부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섰습니다. 당시 빈의 음악 평론가들은 한입같이 이 곡을 깎아내렸습니다. ‘산만하고 비대하다’, ‘구조가 없다’, ‘낭만주의의 과장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괴작’이라는 평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미 60대 중반이던 브루크너는 이러한 혹평에 익숙했습니다만, 그것이 편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당대 비엔나가 보기 거부한 것

    안톤 브루크너
    출처: 위키백과 – Anton Bruckner

    브루크너가 빈 음악계에서 마주친 것은 단순한 비평이 아니라 구조적인 거부감이었습니다. 1870년대 이후 빈은 음악적 진보를 가늠하는 척도로 쇠락해가던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바그너의 영향력은 독일에서 절정이었고, 브람스는 고전 음악의 형식 안에서 현대성을 모색하는 ‘진보적’인 선택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애매한 존재였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전통적인 교향곡의 틀을 따르면서도, 내용상으로는 바그너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들어보면 그 이유가 선명해집니다. 그는 현악기 합주를 거대한 울림의 기둥으로 만들었고, 금관악기들을 종교음악의 그것처럼 숭고하게 배치했습니다. 이는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진행’이 아니라 ‘회귀’처럼 느껴졌습니다. 빈의 평론가들과 음악 애호가들은 이를 ‘구식’이라고 판단했고, 브루크너를 ‘시대에 뒤떨어진 종파음악가’로 낙인찍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브루크너 자신이 이러한 혹평에 일부 동조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쓴 교향곡들을 계속 수정하고, 다른 악곡들의 편집본을 손으로 직접 정정하면서, 마치 자신의 음악이 ‘부족하다’는 판정에 스스로 합의하려는 듯 행동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브루크너의 원본 악보는 여러 버전으로 흩어졌고, 이것이 후대 음악학자들에게는 또 다른 혼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악보 뒤에 숨겨진 구조

    안톤 브루크너
    출처: 위키백과 – 안톤 브루크너

    브루크너의 재평가는 그의 악보를 다시 읽으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 음악학자들은 당대의 편집본이나 비평과는 상관없이, 브루크너가 각 교향곡에 적용한 음악적 논리 자체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놀라웠습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예상과 달리 매우 정교한 건축학적 원리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전형적인 구조는 이러하습니다. 먼저 주제 제시에서 바그너처럼 반복과 변형을 통해 관객을 단계적으로 몰입시킵니다. 그 다음 발전부에서는 이 주제들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밝혀내며, 마지막 재현부에서는 처음 제시된 것보다 훨씬 더 심화된 형태의 주제가 나타납니다. 이는 베토벤의 교향곡 구조와 놀랍도록 유사하면서도, 현대적 화성 감각으로 재해석된 것이었습니다. 즉, 브루크너의 음악이 ‘산만’해 보인 이유는 그것이 당대 청취자들이 익숙한 음악 형식의 속도보다 훨씬 느렸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에 이루어진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녹음들은 이러한 재평가를 결정적으로 강화했습니다. 특히 토스카니니와 카라얀 같은 거장 지휘자들이 브루크너를 지휘하면서, 그의 음악이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사유’ 그 자체임을 증명했습니다. 전후 유럽의 음악계는 서서히 브루크너를 베토벤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곡선의 승리, 그리고 지금

    안톤 브루크너
    출처: 위키백과 – 안톤 브루크너

    오래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학생들이 낯선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관찰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브루크너의 사례는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음악의 재평가’가 아니라, 우리가 예술을 판단하는 방식 자체의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당대 빈은 브루크너를 거부했던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진보의 방향과 맞지 않았고, 현시대의 미학적 판단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수했습니다. ‘진보’라고 불리는 것이 모든 시대에 음악 본질의 진정한 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곡선을 따릅니다. 빠르게 상승하지 않고, 때로는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옵니다. 같은 지점을 여러 번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려진 곡선 전체를 뒤로 물러서서 보면, 그것은 사실 상승의 또 다른 형태였습니다.

    오늘날 브루크너는 고전주의 이후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교향곡 전곡은 여러 거장 지휘자들에 의해 완벽하게 녹음되었고, 콘서트홀에서는 정기적으로 그의 곡들이 올라옵니다. 음악 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에게 브루크너 악보를 분석하도록 권장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결국 진실을 찾아낸다는 낭만적인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더 정확하게는 우리의 청각이 충분히 깊어져야 음악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대의 오해는 사실 우리 자신의 귀가 그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말해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