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 뮌크의 절규가 무대 위로 걸어 들어온 날
UV 조명이 무대 위로 쏟아지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배우의 얼굴이 창백하게 떠오르고,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고, 관객석에서는 누군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최근 오프오프브로드웨이 소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연극은 “UV light floods the stage to reveal an eerie scene”이라고 묘사되었고, 그 장면은 사진가 샌디 스코글런드의 작업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묘사를 읽는 순간 다른 작품 하나가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뭔가가 뒤틀린 얼굴,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소용돌이, 그리고 공포라기보다는 고독에 가까운 그 표정.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였습니다.
뭉크의 이름은 오늘 기사에서 뜻밖의 맥락으로 등장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억만장자 레온 블랙이 소유한 미술 컬렉션을 소개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기사는 그의 컬렉션이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1893) 파스텔 버전, 반 고흐, 세잔, 피카소의 작품들”을 포함한다고 적었습니다. 작품이 누구의 손에 들어갔느냐는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겠습니다. 오늘 제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1893년에 그려진 그 한 장의 그림이 이후 얼마나 많은 장르의 예술가들에게 언어를 빌려주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한 장의 그림이 품은 보편적 감정

절규는 처음부터 회화의 문법 안에서만 읽히기엔 너무 강렬한 작품이었습니다. 뭉크가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는 단순히 풍경이나 인물을 그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감각 그 자체를 그렸습니다. 일기에서 뭉크는 노르웨이 피오르드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다 갑자기 자연이 “무한한 비명”처럼 느껴졌다고 기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감각을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 그는 원근법을 비틀고, 색을 뒤흔들고, 인물의 윤곽을 녹여냈습니다. 결과적으로 탄생한 것은 특정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실존적 불안의 형상이었습니다.
그 보편성이 핵심이었습니다. 절규는 노르웨이 미술관의 벽에 걸린 채로도 이미 하나의 감정적 언어였고, 그 언어는 곧 회화의 경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공학적으로 말하자면, 뭉크는 인간의 내면 상태를 시각적 신호로 변환하는 인터페이스를 설계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 인터페이스는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접속해 쓸 수 있는 개방형 구조였습니다.
무대와 영화가 그 언어를 받아 적다

연극은 아마도 뭉크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흡수한 장르 중 하나일 것입니다. 표현주의 연극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그 뿌리에 뭉크와 같은 화가들이 제시한 감정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물이 내면의 공포나 불안을 표현할 때, 무대는 그것을 현실적인 배경이 아니라 왜곡된 선과 극단적인 명암으로 시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조명이 날카롭게 얼굴 한쪽만을 비추고, 배경은 비틀린 채 기울어지고, 배우의 몸짓은 일상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이것은 뭉크가 절규에서 이미 수행한 작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기사에 소개된 연극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에서 UV 조명이 무대를 가득 채우는 장면이 “섬뜩한 장면”을 드러낸다고 묘사된 것은 그런 계보 위에 놓인 하나의 사례처럼 읽혔습니다. 그 작품이 뭉크를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의 충돌로 감정의 극단을 표현하는 방식은, 뭉크가 먼저 탐색하고 회화 언어로 정착시킨 문법입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포 영화와 심리 스릴러가 뒤틀린 구도와 극단적인 색채 대비를 활용할 때, 그 뒤에는 표현주의 회화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뭉크의 영향을 직접 언급한 감독들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의 작품이 영화적 공포의 시각 문법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예술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맥락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 스밈이 우리에게 묻는 것

그런데 저는 뭉크의 영향을 따라가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뭉크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거의 병적이라고 불릴 만큼 예민한 내면의 상태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극도로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절규는 오늘날 인터넷 밈으로도 소비되고, 연극 무대의 분위기 언어로도 흡수되고, 공포 영화의 시각 문법으로도 작동합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이, 수많은 장르를 가로지르는 공통어가 된 것입니다.
오늘 기사에서 뭉크의 절규 파스텔 버전은 레온 블랙이라는 인물의 컬렉션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 인물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은 복잡하고 무겁습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그 소유의 역사와 무관하게, 이미 수십 년 동안 회화 밖의 세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예술의 특성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가져가느냐에 의해 작품의 생명이 결정된다는 것.
퇴직 후 미술관을 자주 찾다 보니 점점 분명해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장르의 경계는 예술가들이 그어놓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평론가와 제도가 그어놓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뭉크 자신은 그림을 그렸을 뿐이고, 그 그림이 어디로 스며드는지는 그의 통제 밖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제 불가능한 스밈이야말로 한 예술가가 역사에 남기는 가장 진실한 흔적일 것입니다.
어떤 창작이든, 장르를 넘어 다른 사람의 언어가 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비로소 작품이 아닌 영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