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하나로 여섯 언어를 품은 소프라노, 일레아나 코트루바슈
무대 위의 비올레타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베르디가 그렇게 써놓았고, 수많은 소프라노들이 그 죽음을 연기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밤, 어떤 무대에서는 관객이 그것이 연기라는 사실을 잠시 잊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일레아나 코트루바슈를 회고하며 남긴 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일레아나와 함께라면, 우리는 우리가 연기하는 인물을 실제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관객의 가슴에 닿는 기억할 만한 공연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믿었다는 그 한 마디가 오래 남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믿음. 훈련이 아니라 확신. 그것이 어떤 예술가를 단순히 뛰어난 성악가가 아닌, 무대 위의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026년 8월, 일레아나 코트루바슈가 8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밍고를 비롯해 안나 토마오바-신토프, 마리아 호세 시리, 엘리자 발레아누 같은 동료와 제자들이 잇따라 추모의 말을 남겼습니다. 그 글들을 읽으며 저는 이 소프라노의 삶이 얼마나 조용하고 단단하게 쌓여 있었는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빈이라는 결정적 선택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코트루바슈가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빈 국립 오페라단과의 오랜 계약을 통해서였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녀는 빈을 중심으로 베르디 역할들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표현은 슬립트디스크 기사가 직접 쓴 말입니다. “Her Violetta was unassailable.” 공략 불가능한. 빈틈이 없는. 이 단어를 저는 꽤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예술에서 ‘공략 불가능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기계라면 오차율이 0에 수렴하는 상태를 뜻하겠지만, 무대 위의 성악가에게 그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코트루바슈의 비올레타가 공략 불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그녀가 그 역할을 자신의 몸 안에서 완전히 살아낸 방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도밍고가 “우리는 인물을 실제로 믿었다”고 회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저는 읽습니다.
코벤트 가든에는 차이콥스키의 유진 오네긴에서 타티야나로 데뷔했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라 보엠의 미미로 처음 섰습니다. 그녀는 여섯 개 언어로 유창하게 노래했다고 기사는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 언어가 품고 있는 음색과 감정의 결을 몸으로 익혔다는 뜻이고, 그 언어 안에서 살아있는 인물을 빚어낼 수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루마니아어를 모국어로 한 그녀가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노래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그 언어가 속한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억하는 스승

소프라노 마리아 호세 시리는 코트루바슈를 “올바른 노래 방식을 가르쳐준 스승”이라고 불렀습니다. “딸처럼 대해주셨다”는 말과 함께. 또 다른 추모의 글을 남긴 엘리자 발레아누는 빈의 그녀 집에서 이루어진 노래 레슨을 떠올리며 이렇게 썼습니다. “끝내고 싶지 않은 레슨이었다.” 기사에서 코트루바슈의 수제자로 언급된 인물은 앙겔라 게오르기우입니다. 루마니아 출신 소프라노 중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름 중 하나가 그녀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코트루바슈라는 예술가의 영향력이 무대 위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예술가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결정적인 사건이 반드시 화려한 사건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코트루바슈에게 있어 결정적인 것은 빈을 선택한 일이었을 수도 있고, 비올레타를 처음 자기 것으로 만든 어느 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제자에게 “딸처럼” 노래를 가르치기로 결심한 어느 오후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공략 불가능한” 비올레타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는 1972년 독일인 지휘자 만프레드 라민과 결혼하고 코트다쥐르에 빌라를 마련했다고 기사는 전합니다. 무대 밖의 삶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지만, 그 짧은 문장이 어딘가 따뜻한 인상을 남깁니다. 빛 좋은 남프랑스의 어느 집에서, 빈 무대를 뒤로 하고 조용히 살아간 예술가의 만년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요.
무대가 끝난 자리에 남는 것
도밍고, 토마오바-신토프, 시리, 발레아누. 이들이 남긴 추모의 언어는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코트루바슈가 무대 위에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잊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것. 발레아누는 그녀를 “유머가 넘치고 특별한 귀여움을 가진, 항상 따뜻한 영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토마오바-신토프는 “당신 위에는 항상 영원한 빛이 빛나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오페라는 본질적으로 협업의 예술입니다. 지휘자, 오케스트라, 연출가, 상대역 성악가, 무대 스태프. 그 모든 연결 속에서 코트루바슈는 자신의 역할을 완성하면서도 타인을 깊이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학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부품은 혼자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맞물리는 다른 부품을 더 잘 작동하게 합니다. 그녀가 도밍고와 함께 비올레타와 알프레도를 연기했을 때, 도밍고 역시 더 나은 알프레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예술가의 결정적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사실 다 알 수 없습니다. 본인조차 나중에야 알기도 합니다. 하지만 코트루바슈의 삶을 뒤에서 바라보면, 결정적인 것은 화려한 데뷔도, 극적인 전환도 아니라, 매 무대에서 인물을 “실제로 믿는” 일을 반복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반복이 결국 공략 불가능한 비올레타를 만들었고, 앙겔라 게오르기우라는 계승자를 낳았으며, 수십 년이 지나도 동료들이 눈물로 이름을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의 결정적 사건은 때로 단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계속 걷기로 한 수천 번의 작은 결심 안에 있습니다.